김홍기(미술평론가, 번역가)

(...) 검은 구멍이 나를 집어삼킬 것이다. 내가 이 글쓰기를 끝내면 난 언제 다시 열릴지 모를 어둠의 통로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당신이 이 글을 읽을 때쯤 나는 없을 것이다. 죽음이 내 지척까지 엄습해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나의 생사 여부와 상관없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나는,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의 나와 온전히 포개지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 두 ‘지금’을 잇는 경로와 소요시간은 알려진 바 없다. 내가 쓰고 있는 것은 프롤로그인가 에필로그인가. 당신이 읽고 있는 것은 에필로그인가 프롤로그인가. 나의 쓰기는 막 시작된 것인가, 곧 끝나는 것인가. 당신의 읽기는 도착점을 앞두고 있는가, 출발점을 등지고 있는가. 나의 시공간과 당신의 시공간은 얼마나 멀거나 가까운가. 그 사이의 최단거리는 몇 미터이며 소요시간은 몇 시간인가. 이 글을 쓰는 나의 ‘지금’이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지금’으로 배송완료되기 전까지 그 모든 과정은 미지의 것으로 남는다. 경로는 계속 재탐색되고 소요시간은 거듭 재연산된다. 그러므로 당분간은 이 명제만이 유효하다. 검은 구멍이 나를 집어삼킬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이름 없는 증상으로 없는 듯 있을 것이다. 또는 몸체 없는 언어로 있는 듯 없을 것이다. 죽었어도 살았으리라고 가정되는, 살았어도 죽은 거나 진배없는, 차라리 이래도 저래도 당신에겐 매한가지인 (비)존재가 되어 검은 망각의 영토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로딩이 고된 영혼일 것이고, 버퍼링에 걸린 신체일 것이다. 당신에겐 텅 비어 보이는, 그러나 나로서는 불발된 몸짓으로 가득한, 제자리를 맴도는 회전목마 같은 시간이 끈질기게 반복될 것이다. 도약이 유예된 웅크린 시간, 공연이 미정된 리허설의 시간, 호명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야 하는 시간의 터널이 이어질 것이다.
(...) 장서영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이 시간의 터널이며 그곳을 맴도는 신체의 몸짓이다. 그는 이러한 시간을 “시간 외 시간”, “잉여 시간”, “어떤 시간과 시간 사이의 시간”이라고 부르면서, “특정 이벤트가 종료된 다음, 그 다음 이벤트가 시작하기 전까지의 시간, 혹은 특정 이벤트 내의 시간이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구멍 난 시간”이라고 정의한다.1 사물에 빗대어 말하자면 그것은 “구멍 난 치즈에서 치즈를 빼면 남는 것”이다.2 구멍 난 치즈에서 치즈를 빼면 구멍이 남겠지만 그 구멍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인식된다. 치즈의 신체가 사라지고 남은 구멍의 신체가 사건이 종료되고 남은 구멍의 시간을 산다. 이와 같이, 규정되지 않는 신체, 규정되지 않는 시간이 바로 장서영의 작업이 보여주는 ‘블랙홀 바디’, ‘시간 외 시간’이다. 없음으로 존재하는 그것들이 검은색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데, 왜냐하면 검은색도 역시 아무 색이 아님으로써 존재하는 역설적인 색이기 때문이다.
장서영의 비디오작업은 일반적인 서사영화의 반대편에 놓인다. 서사영화의 플롯이 주요한 인물의 액션과 유의미한 사건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면, 장서영의 작업은 서사영화에서 숨겨진 액션과 액션 사이의 제스처, 사건과 사건 사이의 시간으로 채워진다. 그의 작업은 개봉 영화의 한 상영회차가 끝나고 다음 상영회차가 시작하기 전까지 암전된 스크린의 이면에서 투사되는 비밀스러운 이미지와 같다. 관람객이 전무한 텅 빈 극장의 네모난 검은 구멍에서 겨우 비쳤다가 사그라드는 증상 같은 이미지인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장서영의 비디오작업을 영화의 내장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이 곳은 영사기를 끄고 서사영화의 스크린-피부를 들춰내야 비로소 제 몸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수렴되지 못하는 반복적인 수축과 이완의 루프가 자리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 깊숙한 영화의 내장-인물들은 출발지도 목적지도 없이 끊임없이 계단을 오르내리고, 무한한 수영장에서 영원히 반복해서 익사하고, 마사지하듯 연동운동을 거듭하고, 트랙을 질주하여 자꾸만 제자리로 돌아오고, 발신인과 수취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배송을 이어간다. 장서영은 서사의 세계에서 허용될 수 없을 정도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내장의 운동을 시각화하기 위해 비디오의 루프 기법을 구사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검은 구멍 속 내장의 시간을 보이고 들리게 하기 위해서 장서영이 택한 방법은 세계의 안과 밖을 뒤집는 것이다. 그의 블랙홀 바디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몸은 허공이 싫고, 잉여 시간이 싫고, 아무튼 사건이 되고 싶다. 실제 시간, 실제 부피, 없지 않은 것이 되고 싶다. 구멍인 몸을 뒤집으면 부피가 될까 하고 생각한다. 자기 몸에서 나가야만 양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3 내장의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마치 없는 것으로 인식되는 이유는 내장의 몸짓과 소리가 피부를 넘어 당신에게 도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검은 구멍 속의 나는 바깥의 기척을 느끼지만 당신은 내 내장의 사소하고 사적인 사정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장서영은 비디오 매체를 사용해 이 일방적 관계를 뒤집어 아주 중요한 내장을 위한 기념비를 세우고, 원운동을 나선운동으로 잡아 늘리고, 동그라미를 구체로 회전시키고, 구멍을 뒤집어 탑을 쌓는다. 검은 스크린을 헤매는 납작한 (비)존재의 신체와 시간을 부피와 농도를 지닌 삼차원의 실체로 적분하는 것이다. 이제는 내장-인물이 목소리를 얻어 관객에게 보이스오버로 사건을 배제한 이야기를 전하고, 거꾸로 관객의 목소리는 뒤집힌 세계에 갇힌 하울링이 되어 내장-인물의 귓전에 가닿지 못한다.
(...) 그러므로 지금 나는 어떤 영화 속에서 프롤로그인지 에필로그인지 알 수 없는 글을 쓰고 있는 중이다. 아니면 지금 당신은 또 다른 영화 속에서 에필로그인지 프롤로그인지 알 수 없는 글을 읽고 있는 중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사건이 끝나면 (다시) 검은 구멍이 나를 집어삼킬 것이다. 당신이 이 글을 읽는 사건이 끝나면 (다시) 검은 구멍이 당신을 집어삼킬 것이다. 그리고 암전된 스크린 위로,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스크린 뒤로, 장서영의 작업이 (다시) 시작하자마자 끝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나와 당신은 그 내장의 세계에서 반복적으로 마주칠 것이지만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경로를 이탈했다는 소리만이 (다시) 사이렌처럼 되풀이될 것이다. (...)



  1. 장서영 개인전〈블랙홀 바디〉(CR COLLECTIVE, 2017. 9. 5~10. 12) 카탈로그, 페이지 없음. 

  2. 같은 책. 

  3. 같은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