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한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빙엄턴)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한국현대미술의 동시대성에 관한 박사 논문을 준비 중이다. 김범에 관한 비평문으로 2019 SeMA-하나평론상을 수상했다. 한국현대미술을 둘러싼 다층적인 담론의 공간을 연구하고 비평을 통해 미술 작품이라는 기묘한 대상이 그 공간을 가로지르고 비껴가는 방식에 관해 쓴다.

2019년 김익현은 자신이 세운 ‘수석’출판사의 첫 책으로 〈추측하는 사진술〉이라는 제목의 작은 책을 펴냈다.1 책의 중간 즈음에 이런 문장이 있다. “저는 사진 혹은 어떻게 부를지 모르는 것으로부터 가장 먼 곳으로 도망가고 싶었던 것 같아요. 무언가를 찍어야 한다는 강박 혹은 사진의 원죄 같은 걸 생각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또 무언가를 찍었어요.”2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몇 가지 질문을 떠올린다. 사진가가 사진으로부터 도망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사진가에게 ‘사진의 원죄’는 무엇일까. 구원받기 위해 사진가가 도망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은 어디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진가는 ‘무언가를’ 찍었을까. 그것은 ‘사진’일까, 아니면 ‘어떻게 부를지 모르는 것’일까. 책의 제목은 선문답처럼 보이는 이 질문들에 대한 한 사진가의 잠정적인 대답일지도 모른다. 사진은 어떻게 무언가를 ‘추측하는’ 기술일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그는 분명 무언가를 찍고 있었다. 김익현은 언제나 광학기기의 렌즈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카메라가 세계의 구석구석을 부지런히 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세계에 덩그러니 존재하는 것 중에서 사진가의 시선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그는 한동안 1950년 이래 남한에 세워진 기념비를 카메라에 담았다(〈Distance, Depth〉). 국가가 공식적으로 관리하는 숫자만 2,500여 개에 이른다고 알려진 기념비는 (그는 지금도 이따금 기념비를 찾아다닌다고 했다)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한 것도, 조형적인 측면에서 교집합을 이루는 조각상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우리의 신체와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는 돌의 물리적인 현전은 상이한 시간의 축에 걸쳐있다는 점에서 사진가에게 기묘한 존재로 다가왔을 것이다. 기념비가 약속하고 저장했던 시간은 흔히 ‘영원한 현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지금 이곳의 시간과 충돌한다(김익현은 〈Raptured: 휴거〉라는 작업을 통해 밝은 미래라는 가상의 소실점의 형식으로 구축된 해방 이후 한국의 시간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던 80년대 말, 90년대 초의 어떤 순간을 상상했던 적이 있다). 하늘을 향하는 기념비는 분명 그 시간을 품고 있지만, 동시에 이제는 국가가 관리하는 데이터베이스의 납작한 시간 속에, 또는 지금 우리와 같은 하늘을 공유하는 “여기-지금” 존재한다. 김익현이 찍은 사진을 바라보다 나는 문득 남한의 기념비가 사진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바르트를 다시 읽으며 환기하게 되는 “사진의 정체성에 존재하는 역설,” 즉, 사진 속에서 발견되는 “여기-지금과 그때-거기 사이의 비논리적인 결합” 같은 것을 떠올리게 된다.3 돌의 차가운 물리적인 현존은 어떤 미래에 대한 약속이 분명 여기에 존재했음을(지금은 부재하지만) 증언한다. 기념비는 더 이상 이곳에 없지만 분명 ‘그때-거기’에 존재했던 꿈을 저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진을 닮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진가가 사진(적인 사건)을 사진 찍었다고 말할 수 있다(김익현은 ‘fig.’라는 이름으로 문자 그대로 사진을 재촬영하여 마치 도판처럼 제시하기도 했다).
사진가가 세계에 남겨진 것에서 사진적인 사건을 발견하고 그것을 사진 찍었을 때 여기와 거기, 지금과 그때의 관계는 한층 더 복잡해진다. 기념비의 단단한 물성이 그저 평평한 표면의 문제가 되는 순간 우리와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던 여기-지금의 문제, 즉 돌의 물리적 현전의 감각은 그때-거기의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기념비의 손끝이 가리키던 과거의 그 약속은 화학적인 용매로 얼룩진 표면의 세계에서 어디쯤 있는 것일까. 기념비라는 사진은 그 약속을 분명 ‘그때-거기’라는 과거의 시점에 저장하고 있었는데(이제 그 자리를 사라진 현전의 감각에 내어주었다면), 김익현이 찍은 사진의 사진에서 근대의 꿈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선형적인 시간의 축 위에서 어디쯤 있을까. 평면이 되는 순간 사라져 버린 것일까, 아니면 깊은 곳 어딘가에 남겨져 있을까.
사진이라는 침묵이 기념비의 존재를 과거라는 시간 속에 저장한다면, 기념비에 저장된 오래된 약속은 어디에 저장되어 있을까. 사진가는 여기-지금 남겨진 기념비라는 물리적 삶을 사진이라는 이름의 죽음과 이제는 죽어버린(죽었다고 간주되는) 근대성이라는 이중의 부재 사이에 위치시킨다. 김익현이 사진적인 사건을 사진 찍을 때 그는 “재현의 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시간이 켜켜이 쌓인 ‘시간의 층’을 구축한다.4 여기-지금 존재하는 화학적 용매 밑에 언젠가 렌즈 앞에 서있던 기념비가, 그리고 그 아래 어딘가에 기념비가 약속했던 미래가 남겨져 있을 것이다.
김익현이 ‘찰칵’ 구축하는 시간의 건축은 그저 아래로 깊이 파인 형태가 아니라, 옆으로도 무한히 확장한다. 아카이브에는 ‘서울올림픽 요트경기 기념탑’ 옆에 ‘고속도로 준공기념비’가 연결되고, 국제화의 꿈 옆에 산업화의 꿈이 어딘가에 남겨진다. 그가 기념비와 관련해 수집한 사진들은 겹겹이 쌓인 시간의 층을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이어가기도 한다. 기념비가 약속했던 어떤 미래가 사진의 사진이 구축한 깊은 곳 어딘가를 떠돌고 있다면, 그 기념비 앞에서 다짐했던 개인들의 약속은 대체 어디쯤에 있을까.
사진가는 여기서 뷰파인더에 비친 이미지를 다듬는 자가 아니라 사진적인 사건을 포착하고, 또 그것을 사진 찍음으로써 시간을 건축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층층이 쌓인 시간의 층 사이사이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을 때 사진은 더 이상 재현의 기술이 아니라 ‘추측하는 사진술’이 된다. 책과 함께 발표했던 동명의 작품 〈추측하는 사진술〉에서 김익현이 과거에 누군가가(정치인 김종필) 두었던 바둑을 마치 기보처럼 남겨진 사진에 기반해서 ‘추측하며’ 바둑판 위에 다시 두었을 때, 여기서 추측의 의미는 그저 게임의 한 장면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다. 기보라는 그림 아닌 그림은 생각해보면 마치 기념비처럼 시간을 저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진을 닮았다. 아니 어쩌면 돌 하나하나가 바둑판 위에 놓이던 모든 순간을 저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각각의 순간을 기억하는 사진들이 한데 모인 두툼한 아카이브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진가가 바둑돌을 하나하나 바둑판 위에 올리면서 그 사진에 저장된 시간을 이곳으로 불러들일 때 기보라는 사진적인 사건은 일시적으로 여기-지금의 삶과 겹쳐진다. 이는 삶에서 죽음으로 이행하는 사진이라는 사건의 역방향이다. 하지만 그가 그 물질의 현전을 다시 사진 찍을 때(사진의 역을 다시 사진 찍을 때), 기보에 저장되어 있던 시간은 그때-거기에서 지금-여기로, 하지만 다시 어딘가로(분명한 것은 그곳은 ‘그때-거기’는 아닐 것이다) 이동하고 그때 발생하는 시차는 조금씩 어긋나 있는 시간의 층을 이룬다. 사진가는 그 구조의 깊이와 폭을 ‘미루어 생각하여 헤아리기(추측하기) 위해’ 시간이 무수히 어긋나버린 개념적인 공간을 설계한다.
나는 그가 오랫동안 남한의 동굴을 찾아다니며 캄캄한 어둠 속에서 찍은 사진을 바라보며(〈LINK PATH LAYER〉) 사진의 원죄로부터 도망가려 하지만 여전히 무언가를 찍는 한 사진가에 대한 흥미로운 상상을 해본다. 이곳에 남겨진 동굴은 분명 한국 현대사의 구멍이기도 하지만, 눈부신 빛이 좁은 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공간임을 생각하면(한국의 금광산과 카메라는 둘 다 근대성의 ‘장치’이기도 하다), 그 내부는 카메라 속의 어두운 공간을 닮았다. 여기서 나는 그가 카메라 안에서 사진을 찍는 순간을 그려본다. 사진가는 뷰파인더에 이미지가 비치기 이전에, 더 나아가 빛이 필름에 닿기 이전에 자신의 신체로 그 빛을 ‘먼저’ 감각한다. 그가 감각하는 빛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빛이 아니라 미래에 사진이 될 운명을 지닌 빛이다. 사진가는 세계가 발산하는 빛으로부터 ‘사진적인’ 빛을 자신의 신체로 포착한다. 기념비나 바둑과 같은 사건부터, 광케이블을 따라 움직이는 데이터와 근대적인 운송수단 사이의 속도의 차이까지, 사진가의 신체는 시차를 품은 빛을 마주한다. 그 순간 세계의 일부는 사진가의 신체로 찍은 사진이 된다. 그는 그 사진적인 사건을 한 번 더 사진 찍는다. 사진의 원죄가 무언가를 찍는 순간 세계 속으로 내던져진 이미지가 의미로 가득 찬 세계와 충돌하게 되는 것이라면, 이는 필연적으로 재현의 기술에 채워진 족쇄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사진으로부터 ‘가장 먼 곳’은 카메라 안의 칠흑 같은 어둠이 아닐까. 재현의 원죄로부터 구원받고자 하는 사진가는 그곳에서 사진이 되기 이전의 빛을 사진 찍는다.5 오직 그 사진가만이 “재현이 아닌 생성에” 참여할 수 있다.6



  1. 〈추측하는 사진술〉은 현시원 큐레이터가 시청각에서 기획했던 ‘정물화전’의 연계 프로그램에서 렉처 퍼포먼스의 형식으로 처음 발표되었다. 

  2. 김익현, 『추측하는 사진술』 (수석, 2019). 

  3. 제프리 배첸, 『사진의 고고학 - 빛을 향한 열망과 근대의 탄생』 김인 역 (이매진, 2006), 234. 

  4. 사진을 사진 찍는 행위는 자연스럽게 사진의 역사 속 몇몇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예를 들어, 더글라스 크림프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제시했던 미학적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몇몇 사진가들을 옹호하면서, 그들의 사진에서 “각각의 그림 밑에는 언제나 또 다른 그림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사진을 둘러싼 인용, 발췌의 행위가 “재현의 층(strata of representation)󰡓을 드러낸다고 주장했다. 이는 주어진 사진을 다시 찍음으로써 원본과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즉, 사진을 사진 찍는 행위는 그림의 초월성이라는 신화를 폭로하고, 감춰진 “의미화의 구조”를 드러내는 일이었다. Douglas Crimp, “Pictures” October 8 (Spring, 1979), 87. 하지만 김익현이 사진(적인 사건)을 사진 찍을 때 발생하는 거리는 원본과의 거리 따위가 아니다.  

  5. 방혜진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김익현의 사진에 담긴 공허한 깊이는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재현해야 한다는 사진의 ‘원죄’로부터 자신을 구속할 방법을 모색한 데서 비롯된다.” 방혜진, 「매체가 자신을 돌아볼 때, 어떤 정서」, 『A Snowflake』 (국제갤러리, 2018), 115.  

  6. 김익현의 2019년 작품 〈나노미터 세계의 시간〉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재현이 아닌 생성에 어떻게 참여할지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