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주는 현재 우란문화재단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대학에서 서양화와 경영학을 전공하고 미술사 석사를 마쳤으며, 이후 대안공간 풀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를 시작으로, 신세계갤러리 큐레이터, 아시아문화전당 창조원 연구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아티스트콜렉티브 KimChangPractice!!(김장프랙티스!!) 활동도 겸하여, 기획자로서 다양한 정체성을 실험해가는 중이다.

질문과 대답

  • 이미지, 텍스트, 서사에 관하여

장윤주: 근작 〈사로잡힌 돌〉(2019), 〈모나미 153 연대기〉(2010/2019) 그리고 〈Six fingers〉(2012) 작업 등에서 특징적으로 볼 수 있듯이,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출판형식의 작업으로 김영글 작가를 소개할 수 있는 듯하다. 각각의 작업들은 설치, 영상 등의 매체와 연계되기도 하여, 일반적 출판물인 단행본과도 구별되어 시각예술의 범주 안에서 통용되는 작업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작가가 스스로를 소개한, “문학적 텍스트를 시각적 대상으로 연구하는 것”이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를 실험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작업을 한다고 볼 때, 텍스트와 이미지를 어떻게 관계설정 하는가?

김영글: 한 장의 이미지, 하나의 장면은 언제나 축적된 시간을 내포하고 있다. 거기에는 과거와 현재가 들러붙어 있고, 보이든 보이지 않든 배경과 관련 정보들이 존재한다. 보는 이의 관점이나 조건에 따라 같은 이미지가 완전히 다른 의미망 속으로 편입될 수도 있다. 이러한 속성 때문에 모든 이미지는 텍스트와 마찬가지로 읽히고 번역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미지가 하나의 언어라면 텍스트가 하나의 이미지라고 말할 수도 있다. “문학적 텍스트를 시각적 대상으로 연구”한다는 설명은 사실 내가 처음 쓴 표현은 아니다. 미술 활동을 처음 시작할 무렵 전시 《Save the Mona Lisa》(2010)에서 김장언 비평가가 작가 소개에 넣어 준 문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나는 사이에 약간의 변화는 있었겠지만, 내가 시각예술의 자장 안에서 텍스트를 미디엄으로 활용하고, 그것을 새로운 ‘읽고 쓰기’의 과정으로 간주하고자 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그 시도는 여러 시간대의 역사적, 문화적 이미지들을 어떻게 동시대의 이야기로 독해하고 거기에 응답할 것인가 하는 질문과 늘 더불어 움직인다. 나의 작업은 그 이중의 관심사를 교차시키는 과정에서 진행되는 것 같다.
흔히 이미지는 증거로서의 사실성을 갖고 언어는 설명적 성격을 갖는 보완적 텍스트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둘은 어떻게 배치되느냐에 따라 그 속성을 서로 바꿔갖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지도 글만큼 설득력이 있고, 글도 이미지만큼 강렬할 수 있다. 또한 이미지는 텍스트보다 서사가 약한 것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서사를 실행한다. 이미지와 텍스트는 합쳐져서 길항 관계를 형성할 때 우리의 관습적인 사고에 균열을 가하기도 한다. 특히 역사적 사료의 일환으로서 둘을 나란히 다룰 때 그 관계성이 무척 흥미로운 요소로 여겨진다.
내가 시각예술 안에서 텍스트를 이미지와 동급의 미디엄으로 다루는 것은 개인적인 학습의 차원에서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는 순수미술의 기법과 조형언어를 손으로 숙련하는 시간을 상당 부분 건너뛰었고, 언어가 일차적으로 더 자연스러운 표현의 도구인 상태에서 미술을 시작했다. 문학을 전공하는 동안 텍스트만으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데서 어떤 결핍을 느꼈던 나에게, 시각예술은 이미지라는 또 다른 언어의 영역을 새롭게 탐구하는 동시에 텍스트의 무궁무진한 쓰임을 다시 생각하게끔 하는 포맷인 것 같다.

장윤주: 그간 텍스트 기반의 작업뿐만이 아니라, 〈파란 나라〉(2019), 〈해마 찾기〉(2016)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영상 매체 역시 적극적으로 다루어 왔다. ’서사성‘의 구현의 관점에서, 텍스트와 영상 두 매체를 다룸에 있어 작가가 염두하는 서사성은 각 매체에서 어떻게 다르게 혹은 유사하게 구현되는가?

김영글: 여기서는 책으로 엮어 낸 작업을 텍스트 작업으로 간주하고 얘기하는 것이 좋겠다. 책과 영상은 아주 다른 매체 같아 보이지만 내가 생각할 때는 의외로 비슷한 점이 많다. 우선 시작과 끝이 있다. 서사를 품은 매체로서 타임라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목이 적힌 첫 쪽(화면)과 크레딧이 적힌 마지막 쪽(화면)이 있다. 이 작품이 지면(화면) 위에 구현된,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사실을 작품 내에 명시하고 있다는 의미다. 책과 영상은 둘 다 언어와 이미지를 교차하거나 병치시키며 함께 다루고, 배열과 편집으로 구성되는 매체이기도 하다. 또한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상대적으로 비교하자면, 회화나 조소, 설치물처럼 창작 주체가 감각적으로 밀착되어 드러나는 작업에 비해 작품을 서술하는 화자가 예술가 1인칭 시점으로 귀속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나는 내러티브를 구현해 특정한 시간을 점유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는 책과 영상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며 작업한다. 특히 영상에서 스틸 이미지와 내레이션을 중요한 비중으로 사용하다 보니 유사성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 같다. 내가 볼 때 예술의 미디엄으로서 두 매체 사이에 확연한 차이가 있다면 책은 수용자가 타임라인을 능동적으로 조절할 수 있고 영상은 (일반적인 상영 환경에서) 그렇지 않다는 점, 그리고 청각 활용의 여부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후자의 차이는 특히 효과의 측면에서 다른 결과를 야기한다. 영상 매체는 익숙한 이미지와 사운드를 통해 감각으로 각인된 특정 시기의 대중문화 같은 기억을 즉각적으로 소환할 수 있다. 구구절절 서술하지 않고 어떠한 시간대와도 찰나에 조우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영상의 큰 장점이다. 책의 경우에는 작품 속 이야기와 수용자가 만나는 방식이 조금 다른 것 같다. 책을 읽는 사람은 특정한 페이지에서 오래 머무르는 행동, 또는 밑줄을 긋거나 책갈피를 꽂아 다시 펼쳐보는 행동 속에서 창작자가 한번 쓴 서사를 각자의 리듬으로 재구성한다.

장윤주: ‘작품과 작품 아닌 것, 즉 일반적인 사물’에서 작품은 기표와 기의를 발화한다고 볼 때, 김영글 작가가 집중하고 있는 사료, 사물들은 의미가 제거된 혹은 의미 짓기 이전의 물성 그 자체 즉, 기표로만 기능하는 듯 하다. 이와 같이 기표 자체의 사물과 사료들을 다루는 방식에서, 〈해마 찾기〉에 등장하는 나레이션 중 “이미 만들어진 것”은 작품을 의미하는 듯하면서 사료와 사물을 지칭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것은 마치 소설과 수필, 픽션과 논픽션, 역사와 신화처럼 상반된 개념의 애매한 경계에서 질문하기를 즐기는 듯 여겨진다. 어떤 것에 진실성을 더 부여할 수 있다고 보는지? 혹은 어떻게 작품 속에서 기의로서 의미 짓기를 시도하는지?

김영글: 〈해마 찾기〉 내레이션에서 해당 구절은 “과거의 사물”에 포함되는 것으로, 영화나 책 등 이미 만들어져 기록되고 보존된 것을 의미한다. 그 목록에는 도장이 찍힌 서명처럼 증거와 사실로서 역사에 기록된 것,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과 같이 오랜 믿음을 사물화한 것도 속해 있다. 내레이션과 함께 등장하는 이미지 중에는 불태워진 책이나 의미가 날조된 서명도 있다. 존재하지만 허구적인 것, 그리고 존재하지 않지만 단단한 의미를 지닌 것 간의 경계를 흐리며, 사물의 기억이 가진 속성을 추적해 보고 싶었다.
조금 다른 얘기일 수도 있지만, 최근 〈작은 빛〉(2018, 조민재 연출)이라는 영화를 봤다. 주인공이 기억을 잃을 가능성이 있는 뇌수술을 앞두고 캠코더로 가족의 모습을 촬영하는 내용이었다. 캠코더 화면에 포착된 가족의 모습은 미소를 짓거나 춤을 추고 있다. 한편 캠코더 바깥에서 각자가 혼자 있을 때의 얼굴은 뷰파인더에서와 사뭇 다르다. 무표정하고, 고독에 잠겨 있다. 그러나 그 역시 카메라로 촬영한, 연출된 장면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두 얼굴 중 어느 쪽이 더 진실한 얼굴인지를 묻고 있는 화면을 보며, 사실과 허구, 작품과 작품 바깥의 관계에 관해 내가 고민해 온 지점들이 겹쳐 떠올랐다. 어느 쪽이 더 진실한지 해답을 찾는 것보다는 양자 간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지우는 시도 속에서 늘 새로운 질문이 발생한다는 생각이 든다.

장윤주: 김영글 작가의 관심주제인 서사성은 결국 현대(사회/미술)가 잃어버린 ‘이야기 복원’에 대한 어떤 움직임이지 않을까? 구술, 고전, 전래동화와 같이 이들의 일부는 전설과 신화와 같은 역사적 시간대부터 쌓인 공동체의 기억과 관습과도 일면 닿아 있다. 현대미술이 행해왔던 ‘탈맥락과 재맥락 짓기’에서 ‘이야기’로의 전환을 담은 작가의 작업은 한편으로 현대미술 스스로가 정의하는 본연의 시간대를 탈피하는, 어떤 전환의 순간처럼 여겨진다. 이런 관점에서 작가가 ‘이야기 복원’을 통해 동시대성을 어떻게 반영할 수 있을까?

김영글: 우리가 이야기를 잃어버렸다는 진단으로부터 나는 두 가지 함의를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이야기라는 것이 과거의 영역에 속한다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이야기의 복원이 현대사회가 상실했다고 여겨지는 많은 것들, 인간성, 고요한 시선, 진정한 고향, 시간에 뿌리 내린 관계 같은 것들의 이상적 복원과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기대다.
그런데 시간이 비선형적인 것일 수 있다는, 이제는 더 이상 낯설지 않은 가설 앞에 서면, 이야기란 반복되는 과거의 기억들과 미래의 예감들을 끊임없이 재조립하고 재해석해 현재를 ‘새로 고침’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확실히 나는 이야기의 복원에 관심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결국은 좋은 이야기꾼이 되기 위해서 작업을 하는 것 같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야기는 결국 다 기억에 관한 것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그것은 어떻게 기억 되었는가’, 혹은 ‘나는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의 문제 말이다. 좋은 이야기에는 늘 서로 다른 시간들이 공존하고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시간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현재의 어느 지점에선가 조우한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