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정은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현대예술과 트라우마: 주디스 허먼을 통해 본 니키 드 생팔의 트라우마와 회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전시립미술관에서 2001년부터 2011년까지 학예연구사로 일했고, 이후 아트센터 나비에서 전시팀장으로 근무했다. 2012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일하며 주로 미디어아트 관련 전시와 프로젝트들을 기획/실행해왔다. 2020년부터는 필름앤비디오를 담당한다. 주요 전시로는 《미래는 지금이다: 국립현대미술관 뉴미디어 소장품전》, 《장영혜중공업》(2013), 《쉬린 네샤트》(2014), 《끝없는 도전-아시아의 여성 미디어 선구자들》(2014), 《윌리엄 켄트리지: 주변적 고찰》(2015), 《크지슈토프 보디츠코: 기구, 기념비, 프로젝션》(2017), 《올해의 작가상 2018》(2018), 《김순기: 게으른 구름》(2019), 《낯선 전쟁》(2020) 등이 있다. 사회 내에서 다양한 매체를 통해 새로운 영역을 확장해나가는 미학적/정치적 아방가르드 예술실천을 주된 연구주제로 삼고 있다.

납작한/납작하지 않은 세계 투명한/투명하지 않은 세계

이수정(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세상에 방송국은 KBS, MBC, SBS, EBS 정도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1990년대 중반, 〈뉴미디어와 현대사회〉라는 교양 수업 시간에서 교수가 ‘VOD’라는 개념을 설명하며, 앞으로의 사회는 각자 원하는 대로 영상을 골라서 원하는 시간에 보게 되는 사회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시간 맞춰 TV앞에 앉고, 다시 보고 싶으면 녹화 버튼을 눌러 붙잡아야 하던 시기였기에 Video on Demand라는 그 단어가 꽤 환상적으로 들렸다. 케이블방송국, 인터넷 동영상을 통한 다시 보기, 유튜브라는 동영상 채널의 등장, 스마트폰의 등장과 보급, 넷플릭스 등 OTT 서비스 등장 등 그 이후 수많은 변화가 연달아 일어나면서 이젠 영상에 둘러싸인 환경이 환상이 아니라 현실,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현실이 되었다.
영상을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것뿐 아니라 기록의 수단으로 손쉽게 제작하게 된 요즘, 영상은 대다수의 작가들에게 과거의 드로잉만큼, 때로는 드로잉보다 더 익숙한 표현수단이다. 하지만 이때의 영상은 모니터라는 사각의 틀에 담겨 있는 비물질적이고 시간적인 이미지들의 연속으로 과거의 표현으로는 ‘내용’, 요즘 말로는 ‘콘텐츠’나 ‘내러티브’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무엇에 관한 영상으로, 주제와 소재에 방점이 찍히는 경우가 많다.

권아람의 작품은 영상이 나오는 모니터, 반사를 만들어내는 거울, 공간 내에서의 설치가 어우러져 있다는 점에서 영상, ‘무언가에 관한 영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권아람의 작품은 모니터에서 나오는 영상에 무게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니터에 나오는 영상과 모니터, 모니터 주위의 사물과 환경 간의 위계를 다룬다는 점에서 ‘영상에 관한 무언가’라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영상’을 보고 이해하고 소비하는 우리의 익숙한 행동양식, 영상에 대한 믿음 혹은 오해의 지점들을 짚고 있다는 점에서 영상으로 둘러싸인 우리의 인지체계에 대한 작가의 감각과 인식의 결과물이다.

권아람의 작품을 대면한 관람객이 제일 먼저 시각적 혼란을 느끼고, 이어지는 인지적 혼란을 겪는다. 익숙한 TV 모니터에 명징한 컬러의 색면과 반사경 등으로 구성된 기하학적 형태의 오브제, 그 세부 각각은 파악하기 어려운 요소들이 아니다. 하지만 직각을 마주한 모니터들과 그 위에 부착된 거울은 옆 모니터의 영상과 주위 환경과 사물을 담아내고 뒤섞는다. 정면을 반영하는 거울은 외부를 내부로 끌어들이고, 모니터는 내부의 영상을 모니터 밖으로 송출해낸다. 둘 다 모두 납작하고 동일한 형태의 두께를 갖지만 둘 다 모니터 두께보다 더 깊고 넓은 세계를 끌어들였다가 뱉어내기를 반복한다. 내가 보고 있는 저 이미지는 어디서 온 것인가.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실재하는 것인가 혹은 반사된 이미지에 불과한가. 이런 질문들 속에서 견고하고 확실하다고 믿었던 시각과 인지능력에 대한 믿음에 균열이 생긴다. 〈납작한 세계〉라 명명하지만 실상 권아람의 작품이 환기시키는 것은 ‘납작하지 않은 세계’, ‘납작해지지 않은 세계’이며, 〈투명한 사물들〉 역시 오히려 실체를 파악하기 힘든 사물, 즉 ‘투명하지 않은 사물’들의 존재를 환기시킨다.

남서울분관에서 전시한 〈유령월〉은 실재와 비실재의 이미지 간을 오가는 장치가 더 선명하고 극적으로 드러난다.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중력이 느껴지지 않도록 세심하게 연출된 모니터의 화면 중 일부분은 거울이다. 거울은 관객이 서 있는 전시 공간 내의 세부-구 벨기에 영사관의 벽난로, 고풍스러운 나무 바닥의 문양 등-를 비춘다. 그러한 요소들을 통해 ‘거울’이라고 확신했다가 실제 공간에 없는 요소들-붉은 색과 파란색의 기하학적 형태들-을 발견하면 거울에 반사된 이 형태들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어 당황하게 된다. 거울이 실재하는 것을 반사하고, 모니터는 영상을 송출한다, 고 우리는 믿는다. 권아람은 그 두 속성을 혼재시킴으로써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헷갈리게 하고,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실제 일상에서 영상을 통해 접하는 많은 정보들을 쉽게, 의심 없이 믿어버리는 것과 대조적으로 권아람이 연출한 약간의 트릭만으로도 혼란스러워진다. 작가가 이미지를 담고 있는 그릇으로서의 모니터 스크린에 대한 관습적인 소비방식을 흔드는 것도 같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정면으로 마주한 4:3 혹은 16:9의 가로비율 모니터는 오랫동안 익숙해진 TV라는 매체 혹은 사무실의 PC 스크린을 연상시킨다. 이 때 스크린은 영상을 담는 도구로 축소된다. 반면 세로로 세우거나 바닥에 깔거나 비스듬히 세울 때, 스크린은 그 안의 내용에 대한 관습을 깬다는 점에서 낯설다. 권아람은 〈미완의 언어〉(2014)는 모니터를 바닥에 놓은 바퀴 달린 낮은 손수레 위에 올렸고, 최근 연작에서는 수직으로 세워 공간에 띄웠다. 그 결과 모니터의 내용에 집중하기보다 모니터와 주위환경 사이에서 발생하는 마찰 혹은 의외의 조화에 집중하게 된다. 이러한 인지적 혼란을 통해 작가는 시각적 유희의 순간을 만들어내는 한편, 영상을 둘러싼 견고하고 막연한 믿음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한다.

시각적으로 명료하고 간결한 작품에 비해 설명이 많은 편인 제목에서 나타나는 패턴도 흥미롭다. 《납작한 세계》(2018), 《부유하는 좌표》(2016), 《불화하는 말들》(2015), 개인전 제목들뿐 아니라 작품제목도 〈투명한 사물들〉, 〈미완의 언어〉, 〈말 없는 말〉 등은 형용사와 명사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말 없는 말〉, 〈미완의 언어〉처럼 그 자체로 반어적인 의미를 갖는 경우도 있지만, 부유하는 좌표나 납작한 세계, 불화하는 말들에서는 예측과 다른 상황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담겨 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좌표를 지키며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재편성되는 상황에 대한 경험, 불편함, 어색함을 연상시키며, 불화하는 말들은 서로 이해와 소통을 향해 사용되는 말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부딪히고 충돌하는 상황을 연상시킨다. 〈Surfaces〉와 같이 평평하고 매끈하게 표현된 이미지 뒤의 평평하고 매끈하지 않은 실재에 대한 관심 역시 ‘표면’이라는 말로 환원되지 않는 깊이를 반어적으로 표현한다. 쉽게 잡히지 않는 좌표, 납작하게 깎아내진 표면 뒤 가려진 주름지고 가려진 세계, 더욱 더 벽을 느끼는 언어의 세상이 권아람의 작품 속에 있다. 그래서 그녀의 제목들은 마침표가 아니라 느낌표나 물음표를 붙여야 비로소 이해될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