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지는 서울을 기반으로 독립 큐레이터로 활동하며 전시기획사 에이전시 뤄뤼(AGENCY RARY)를 운영한다. 학부는 경제학을, 석사는 미학을 전공했다. 부산의 독립문화공간 아지트 큐레이터를 시작으로, 미술문화비평지 《비아트》 편집팀장, 《제주비엔날레2017》 큐레토리얼팀 코디네이터, 통의동보안여관 큐레이터로 일했다. 《7인의 지식인》(2020),《줌 백 카메라》(2019), 《어리석다 할 것인가 사내답다 할 것인가》(2018), 《유쾌한 뭉툭》(2018), 《우정의 외면》(2015) 등을 기획했다. 이전에는 현대미술의 정치적, 미학적 알레고리로서 우정, 사랑, 종교, 퀴어의 실천적 성질에 관심이 많았다. 이 관심은 수행성과 정동 개념으로 확장되어, 이를 전시와 비평으로 연계하고자 했다. 최근에는 예술 외부의 질문에 기대지 않는 추상의 가능성, 예술의 속성 그 자체로서의 추상성에 대해 고민한다.

“현대 예술에서 가장 흥미로운 작품들은 자기 매체의 역사를 설명하는 데 열중한다. 과거의 예술을 언급하는 이 작품들을 이해하려면, 최소한 최근의 역사에 관한 지식 정도는 갖추고 있어야 한다. 해럴드 로젠버그가 지적했듯이, 현대 회화는 그 자체로 창조 활동이자 비평 활동이다. 이 지적은 최근의 영화, 음악, 춤, 시, 문학에서도 수없이 확인된다.” —Susan Sontag, “One Culture and the New Sensibility”, Mademoiselle, 1965.

반갑게도 윤향로 작가에게 질문할 기회가 생겼다. 위에 인용한 문장은 수전 손택의 에세이와 평론을 모은 『해석에 반대한다』에 실린 「하나의 문화와 새로운 감수성」에서 발췌했다. 회화가 낡고 오래되어 한계가 많은 매체인 것이 아니라 회화의 창작 자체가 그 자체로 비평이 될 수 있다는 로젠버그의 지적을 다시 정독하고 싶었다. 그만큼 어려운 매체인 동시에 가장 급진적일 수 있는 매체인 회화를 윤향로 작가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몇 가지 질문을 던졌고, 나는 그의 다음 행보가 무척 궁금해졌다.

박수지: 향로 작가님은 회화를 하시니까 더욱 여쭤보고 싶은 부분이 있어요. 다른 미술 장르와 비교했을 때 회화사는 무척 긴데요. 작가님은 자신이 창작하는 회화의 좌표를 염두에 두고 작업하시나요?

윤향로: 신경 쓰게 되는 것 같아요. 학생 때 수업의 장면이 떠올라요. 오인환 선생님 수업을 좋아했어요. 그때 들었던 수업 중에 할 포스터의 『실재의 귀환』을 함께 읽었어요. 역사가 선형적으로 흘러가거나 인과관계가 있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가로축의 역사를 살펴보는 게 아니라 세로축의 단면들을 살펴보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나눴던 게 기억나요. 작업을 하고 있는 태도에도 분명 ‘그래프’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저의 작업의 맥락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가며 가로축으로 흘러가는 것도 있지만, 세로축으로 작동하는 부분도 있는 거죠. 항상 저와 저의 작업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고민하고 있기는 한데 이런 고민이 작업에 잘 드러나는지는 모르겠어요. 최근에 수업할 때 자료조사를 하면서 MoMA에서 2015년에 했던 전시 《The Forever Now: Contemporary Painting in an Atemporal World》를 살펴봤었어요.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 소설에서 나오는 ‘무시간성(a-temporality)’을 키워드로 전시를 기획 했더군요. 다양한 스마트 기기, 디지털 디바이스가 활발히 쓰이는 시점에서 과거의 것과 지금의 것이 공존할 수 있는 상태를 일컫는 것으로 그 용어를 썼다고 해요. 전시의 기획자는 자신이 선택한 작가 혹은 작품이 시간성을 초월하는 작업으로 작동할 수 있길 기대했다고 하더라고요. 전시에서 보여줄 작품이 동시대에 갇혀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던 전시였던 거죠. 이건 기획자의 욕망이기도 한데, 작가 모두의 욕망이기도 하잖아요.

박수지: 말씀하셨던 그래프를 연표 같은 것으로 생각해봐도 될까요? 선형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가로축이라면, 세로축은 어떤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나요? 무언가가 겹친다는 의미일 텐데요.

윤향로: 하나하나 개별의 작품이 세로축을 만들어내는 것 같아요. 수많은 세로축들이 동시성을 만들어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해요. 어쩌면 가로축은 이제 조금 희미해져 있고, 스타카토처럼 많은 세로축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박수지: 작가님의 회화가 ‘추상’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더러 보여요. 작가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던 적도 있고요. 작가님의 작품에서의 추상성의 속성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이건 계속 가져갈 수밖에 없는 질문이잖아요. 지금 이 시점의 아이디어로 짧게 규정되는 생각이 궁금합니다.

윤향로: 용기내서 말해봐야겠네요. 2020년에 발표한 ‘캔버스들’ 시리즈 바로 이전까지는 추상에 대한 접근을 ‘이미지를 다루는 태도나 방식에 있어서의 추상’이라고 생각하면서 작업을 했거든요. 지금은 그 뿐만 아니라 사고체계를 다루는 기술로서의 추상의 태도가 추가되었달까요. 추상의 역사와는 조금 떨어져서, 제 안에서의 추상의 정의를 하자면 그렇고요. 이미지로 추상에 대해 고민을 시작했던 것은 아무래도 기존에 있는 이미지를 차용해서 그린다는 것이 대전제였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은 이미지뿐만 아니라 사고자체나 회화의 작동방식에 대한 프로세스까지도 회화적 추상의 범주 안에서 고민을 하려고 하고 있어요.

박수지: 그렇다면 회화의 속성에서 결코 누락시킬 수 없는 요소가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그것은 재료나 도구에 대한 것일 수도 평면이라는 조형적 특징일수도 있겠지만요.

윤향로: 요즘에 자주 이야기 되고 있는 형세로 보면 ‘지지체’라고 이야기해야 답이 될 것만 같은데, 이게 제 답이 될 수 있을까 싶기는 해요. 절대 떼고 갈 수 없는 요소는 아무래도 역사성일 것 같아요. 저는 생각보다 페인터리(painterly)한 회화를 좋아하긴 하는데, 제가 해야 할 회화는 따로 있다고 생각해요. 그건 제가 잘 할 수 있는 테크닉적인 부분이나, 삶에서의 관심사, 저라는 인간의 태도가 융합되어서 제가 할 수 있는 회화가 발생하는 것이고요. 관객의 태도로 봤을 때 압도적으로 느껴지는 회화가 가진 속성은 아무래도 물성인 것 같아요. 물감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것만 봐도 어떤 희열을 느끼니까요. 그래서 페인터리(painterly)한 회화가 계속 소비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물질적인 매력이 있으니까요.

박수지: 향로 작가님은 이제 어떤 재료나 도구에 관심이 있나요?

윤향로 : 관심이 너무 많고 동경이 있는 것은 사실 오일 페인팅인데 손 놓은 지 너무 오래되어서 연습만 하고 있어요. 학부 때 연습 삼아 해볼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저에게 미술의 재료는 부가적으로 따라오는 요소였어요. 아이디어가 먼저고 그것을 물리적으로 구현할 때 선택해야 하는 미디엄은 무엇이 타당할까 고민하고, 구현하고 프로세스를 만들어내는 결정이 그 다음인 것 같아요. 지금은 ‘유사-회화’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회화 주변에 따라오는 것을 보다보니까 재료 자체를 연구하지 않으면 작업을 길게 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전에는 예술가가 좋은 디렉터면 된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작가가 재료의 정확한 이해가 없으면 작품의 완성과 방향이 컨트롤이 안 되는 것 같아요.

박수지: 이번에는 ‘세계를 스크린샷’하는 것으로서 회화에서의 작가님의 선택에 대한 질문이에요. 작가님이 말씀하시는 ‘발견된 오브제(found object)’로서의 기성 이미지를 작가님 회화의 재료로 할 때 그 재료의 선택에 있어 신중해지는 부분, 선택의 결정 요인이 되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윤향로: 작가의 생각과 작업이 발전되어가는 변화랑 재료의 선택이 같이 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2017년부터는 제가 끌고 갔던 ‘유사-회화’라는 키워드에서 ‘유사’를 더 괄호 안에 넣고, 회화 자체에 초점을 맞춰서 재료를 선택해왔어요. 다만 아크릴을 주로 사용하더라도, 재료를 사용하는 도구에 좀 더 제약을 둬서 아크릴을 사용해도 붓을 들지 않는 방식, 스프레이로 분사하는 방식을 사용 한다던가 하는 대전제가 있었어요. 붓으로 무언가를 표현한다는 상황은 엄청난 주관성이 개입되는 행동인데, 제 작업 안에서 주관적인 태도가 드러나는 게 꺼려졌어요. 계속해서 객관적인 태도로 무언가를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학부 때 그렸던 그림도 제가 그린 게 아니라 어디에선가 발췌한 이미지로 그린다던가, 작가의 주관이 직접적으로 보이는 방향을 피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발생하는 문제는 에어브러시 같은 도구의 한계 같은 게 있기 때문인데요. 그것을 돌파할 지점을 찾는 게 저의 과제이기도 했고요. 원래는 에어브러시로 제가 만들어내는 디지털 이미지를 묘사하는 방식으로, 프린트를 한다고 생각하고 작업을 해왔었어요. 최근 전시에는 도구는 에어브러시지만 회화적인 표현의 수단으로 활용해봤던 것 같아요. 물론 스케치나 에스키스가 많기는 했지만 그것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게, 좀 더 우연성이나 즉흥성이 반영 된 것 같아요. 이런 변화는 2010년대 중반이후로 에어브러시를 활용한 수많은 작품들을 보면서 고민이 됐던 부분이기도 해요.

박수지: 향로작가님이 발췌한 이미지를 그리는 것과 리히터가 사진을 그리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여기서의 사진은 파운드 오브제(found object)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발견된 오브제로써의 기성이미지를 선택할 때 향로 작가님이 고려하는 부분은 무엇일까요? 여기서는 향로 작가님의 객관성을 지향하는 주관적 선택이 작동하니까요.

윤향로: 아무래도 제가 선택한 이미지는 일단 관심사의 영역 안에서 선택된 것이지만, 그럴 때 가장 신중해지는 부분은 실질적으로는 저작권이에요. 저도 생산자로서 다른 생산자의 권리라고 생각하기도 하니까요. 최근 전시 《캔버스들》에서 헬렌 프랑켄탈러(Helen Frankenthaler)의 카탈로그 레조네를 일부 참조 할 때는 지면을 아주 크게 확대 한다거나, 인용한 페이지를 분명하게 밝히는 장치를 두었어요. 그리고 또 다른 면으로는 제가 선택한 이미지 자체가 시간이 지난 뒤에도 제가 설정 해놓은 시대만 바라보는 이미지가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박수지: 향로 작가님의 회화 내부에 시간이나 공간이 들어있다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시간과 공간일까요? 그 시간과 공간은 캔버스라는 물리적 실체와 마주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그리고 이 화면 안에 어떤 내러티브(narrative)가 있나요? 내러티브가 있다면 작가님의 회화 안에서 그것을 발생시키는 최소 단위는 무엇일까요? 아니면 이 질문은 작가님의 작업에 필요가 없는 질문일까요? 필요가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되시면 또 편히 다른 이야기를 해주셔도 됩니다.

윤향로: 미디엄에 따라서 작품을 감상할 때 저의 태도가 조금씩 다른 것 같은데, 영상을 볼 때는 타임라인을 계속 따라가게 되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시간성이 즉각적으로 두드러지는 매체니까 지금 현재를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이와 달리, 사진을 볼 때는 순간은 아니지만 무호흡을 최대한 유지해야 할 것 같은 감상자의 상태가 돼요. 회화 같은 경우에는 표면만 볼 수 있는 매체가 아닌 것 같아요. 이건 제가 제작자이기도 해서 그럴 텐데, 다른 회화 작품을 볼 때 어떤 프로세스로, 무슨 레이어로, 어떤 재료로, 어떤 붓질로 그렸는지, 스케치부터 순서가 보이고 그것을 보는 게 재밌기도 하고요. 이걸 ‘깊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을 것 같아요. 어떤 단어를 완벽하게 찾지는 못하겠지만 ‘층’이 있는 것 같아요. 회화를 볼 때는 특히 작품이 제작되는 과정을 상상하며 보게 되는 것 같아요. 물질성이 시간성이랑 맞물려서 같이 작동하는 것 같고요. 저는 그동안 그 시간성, 공간성이 최대한 드러나지 않게 멀징(merging) 시켜서 작업 하고자 했었어요. 캔버스 안에서 그 내러티브와 레이어가 최대한 안 보이게 하려고 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최근 《캔버스들》에서 접근 방식은 비슷하긴 하지만 물리적으로 한 레이어마다 물성으로 구현하는 부분에 차이가 생겼어요. 하나의 레이어 안에 내러티브를 담기도 하고 레이어와 레이어 사이에 내러티브를 담기도 한 것 같아요. 어쨌든 제가 바라보는 좋은 회화의 방향이 저 멀리 있고 그것을 잘 하고 싶은데, 그것을 성취하기까지 제가 겪어나가는 과정과 고민들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하는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는 좋은 회화의 방향과 실제로 평단에서 납득되는 회화가 서로 상응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한때, 동료들과 부단히 노력하면서 뭔가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느 순간 단단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했고요. 개인이 생각하는 미술은 정말 다르구나 생각했었어요.

박수지: 니체가 『반시대적 고찰』에서 동시대인에 대해서 말했죠. 시대가 자랑스러워하는 역사적 교양은 시대의 폐해, 질병, 결함이고 동시대인이란 자기 시대의 요구에 순응 하지 않는 사람이다.

윤향로: 지금 이 시대도 그 말이 성립될까요?

박수지: 저도 모르겠어요.

이 인터뷰는 ‘모르겠다’는 말로 맺음 했다. 인터뷰에 등장하는 질문과 고민이 지금 이 시대에서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질문에 발신하는 윤향로 작가의 말 또한 근과거와 현재를 관통하고 있다. 이 응답에 대한 비평이 있기 위해서는 또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때까지 성실한 목격자가 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