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수민은 미국 존스홉킨스대학교 인류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기후변화와 숲-나무에 대한 과학적 지식의 생산과 방법, 역사를 주제로 인류학적 현지조사와 아카이브 조사를 수행하고 있다.

지성사학자이자 문화사학자인 조셉 아마토(Joseph Amato)는 ‘걷기’의 역사가 필요의 문제에서 선택의 문제로 이행해왔다고 주장한다.1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Marvin Harris)의 말을 따라 인류는 두 발로걷기(bipedalism) 시작하면서 등장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아마토는 수렵/채집 생계와 보병의 출현, 순례, 상층 계급의 여가, 기계화 이동 수단의 보급, 도시의 발달과 산책자(flâneur)들의 출현, 등산 혹은 자연으로의 산보, 박물학자(naturalist)들의 탐사 활동, 정치적 혁명 등의 다양한 장면을 횡단하면서 걷기라는 친밀한 행위를 역사의 전면에 부각시킨다. 그러면서 아마토는 우리의 현대가 걷기를 줄여 나가는, 타거나 앉아 있는 문명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즉, 걷기는 필수가 아닌 선택에 가까운 무엇이 되었다. 걷기는 운동이 되었고, 라이프스타일이 되었고, 문화 산업이 되었다. 걷기는 예찬되고, 전시되고, 판촉된다. 코로나-19 대유행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런데 이 역사적 파노라마에서 간과된 점을 꼽자면, 걷기가 하나의 ‘방법(method)’이기도 하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이후로 방법은 대체로 과학적 엄밀함을 보증하는 수단을 의미해왔다. 하지만 어원적으로, ‘method’는 무언가를 뒤따르거나 추구한다는 뜻의 meta-와 길, 경로, 여행 등을 뜻하는 hodos의 합성어다. 요컨대 방법은 그 의미론적 지층에 걷기라는 행위를 실제적으로든, 은유적으로든 포개어 놓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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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는 비평가가 아닌 인류학 연구자로서, 식물이 만들어 가는 세계를 이해하고 번역하는 과학적 방법의 다원성에 관심을 갖고 현지조사(fieldwork)를 수행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글쓴이는 식물과 동물, 균류 등 생물을 소재로 삼는 이소요의 작품을 볼 때마다 작가의 방법, 그 중에서도 특히 ‘걷기’에 주목하게 됐다. 이는 글쓴이가 2019년 10월 충청북도 속리산 기슭에서 작가와 함께 야생 버섯을 찾아 걷고, 다시 2020년 10월 서울시 하늘공원에서 억새와 야고의 공생을 찾아 걸으면서 움튼 인상일지도 모른다. 일반적인 답사 프로그램에서는 훈련 받은 안내자가 해설 대본을 변주하면서 참여자들을 이끄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소요가 이끄는 답사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는 어떤 ‘대본(script)’을 듣는다기보다는 작가의 ‘기술(description)’을 듣는다는 느낌이 들어 각별히 흥미로웠다. 길을 가며 작가가 포착하는 것들을 보고 이야기를 나눌 때면, 대본에 쓰인 지식을 전수받기보다는 생동하는 세계를 작가가 탐구하는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제 자리에 있는 정물들보다는 변화하고 움직이는 사물과 물질들, 쓰여 있는 대상들보다는 무언가에 대해 말하고 혹은 말을 걸어오는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2020년 10월 22일 작가와 함께 하늘공원을 걷고 내려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어딘가로 갈 때 특별히 고려하는 점이 있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특별히 무엇을 볼 거라고 기대하고 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모르니까. 전혀 모르는 곳에 가니까. 하지만, 이를테면 야고라는 기생식물이 있는데, 원래는 서울에 자생하지 않던 식물이지만 어떤 특수한 상황 때문에 여기 하늘공원에 많이 퍼지게 됐다는 단서를 얻게 되면 그에 대해 더 집중해서 보게 된다. 모든 사람이 여행하면서 다 그럴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다가 단서를 통해 의미가 발생하는. 작가에게도 그런 계기들이 있었는데, 단순하게 넘기지 않고 다시 가보고 더 살피는 과정이 뒤따랐다. 산책하면서 우연히 이상하게 생긴 식물을 보았는데, 우연찮게 그때 야고를 포함하는 기생식물을 시리즈로 그린 식물학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구체적인 관심이 시작됐다. 그림에서 본 식물이 하늘공원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왜 제주도가 원산인 식물이 여기 있을까 궁금해지고. 호기심, 기회, 관심이 잘 맞아서 소재가 선택되었던 것 같고, 이 소재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에 입주하게 되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기회가 이어졌다.2

작가의 이전 작품 활동, 이를테면 ≪관상용선인장디자인≫(2015, 갤러리175) 전시와 ≪식물계≫(2020, 보안여관) 전시 참여 작품 〈제주도 동백나무와 보낸 이틀: 그림 속 식물의 생태적 주관성을 상상하며〉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친구들과 같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갔는데, 마침 미술관 창립 50주년을 기념하여 ≪광장≫전이 열리고 있었다. 이때 강요배 화백의 〈동백꽃 지다〉 시리즈에 포함된 그림을 처음 보았다. 배경에서 학살을 암시하는 장면이 어렴풋하게 펼쳐지는 가운데, 앞에서 꽃이 나뭇가지에서 분리되어 떨어지는 찰나가 묘사된 커다란 그림을 보면서 피와 꽃이 붉은 물감을 매개로 연결된 모습을 보게 됐다. 그러면서 식물이 고통이나 재난을 표상하기 위해 사용된 사례가 수없이 많지만 그의 생태는 완전히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래서 제주도에 가게 되는 과정이 있었다.

이소요는 주로 “우연”과 “행운”에서 힘을 얻는다며, 작품 활동 과정에서 “무언가를 조사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일을 시작한 적은 없다”고 말한다. 대신, 이소요는“단서”를 따라 길을 나선다. 따라서 이소요에게 단서는 단순히 수동적으로 주어진 것(data)이 아니다. 이소요의 어휘에서 단서란 보이는 것이거나, 얻는 것이거나, 찾는 것이거나, 더 나아가서는 통하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서 단서를 따라가는 작업 방식이 이소요만의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단서에 대한 예술계와 과학계의 관심은 그 뿌리가 깊다. 미시사 연구자 카를로 긴즈부르그(Carlo Ginzburg)의 저술은 19세기 말 유럽에서 ‘단서(clue)’가 이끄는 불확실한 과정을 따라가는 과학적 방법이 출현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얼핏 사소해 보이는 흔적과 증상에서 시작해 더 깊은 실재에 대한 이해와 인식으로 나아가는, 즉 ‘추정(conjecture)’에 기반을 둔 과학의 패러다임이 인문학은 물론 자연과학과 의학에도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3 긴즈부르그는 이러한 새로운 흐름을 “기호학적 패러다임”이라고 부른다. 기호학적 패러다임 아래서, 탐구자는 단서-기호에 응답하면서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작은 세계에서 더 큰 세계로, 더 넓은 관계와 더 많은 앎과 배움으로 나아간다. 단서-기호에는 상징 질서의 자기 반복적인 순환 고리를 넘어설 수 있는 잠재력이 존재하며, 그곳은 상징질서의 외부로서의 황무지가 아니라 기호적으로 풍부하고 독특한, 근본적으로 열려 있는 세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소요가 일상적으로 마주쳐 온 단서-기호에 대해 “이끌리는” 방식, 혹은 단서-기호들에 “반응하면서 가는” 과정 자체야말로 이렇듯 열린 세계로 들어가는 방법이라고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딘 걸음으로 단서-기호를 따라 걷는 과정이란 시간적 효율성을 추구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들뢰즈는 〈프루스트와 기호들(Proust and Signs)〉에서 이렇게 적는다: “우리가 시간을 헛되이 써버린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우리는 이미 기호들의 견습생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는 우리들의 게으른 삶이 우리들의 작품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4 그런데 여기서 기호는 오직 인간만의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상기하는 일도 중요할 것이다. 인류학자 에두아르도 콘(Eduardo Kohn)이 보여주듯,5 또한 동물학자 야콥 폰 윅스퀼(Jakob von Uexküll)이 주장하듯,6 생명은 곧 기호적 현상이며 따라서 기호는 언어와는 달리 인간 너머의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인터뷰에서 이소요는 야외로 나아가 “식물의 시간에 맞추어 쫓아가다 보면 다른 것은 다 뒷전이 될 수밖에 없다”고, “가장 중요한 것에만 신경 쓰는 시간”을 보내면서 “한 번도 인식한 적 없던 것이 눈에 띄고 그것들을 연결해서 [새로운] 단서들이 보일 때 무척 즐겁다”고 말한다. 이소요는 세계가 내뿜는 단서-기호들에 반응하며 길을 나서고, 또 그러한 연결과 관계들로부터 배워나간다. 이렇듯 길을 걷는 이소요의 앎과 탐구의 과정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이상적인 작품 활동의 과정이란 “작품을 일부러 하는 게 아니라 삶을 살면서 나온 부산물이 예술로 읽히는, 삶의 증거가 충분히 쌓이는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이소요의 언급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복잡한 세상의 하나의 측면에 주목하여 깊이 있게 탐구하는 일은 예술과 과학에서 큰 차이가 없다고 본다”는 이소요의 말에도 동의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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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에세이의 제목에서 “걷는(ambulatory)”이라는 표현은 프래그머티스트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로부터 따왔다.7 제임스는 앎(knowing)의 양식을 도약하는(saltatory) 것과 걷는(ambulatory) 것으로 구별한다. 도약하는 앎은 앎의 결과를 추상화하고 지식을 기본적 요소, 개요, 혹은 캐리커처(caricature)로 환원하여 다루는 방식을 뜻한다. 따라서 도약하는 앎에서 과정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반면 제임스에게 걷는 앎이란 아이디어를 실재와 연결해가는 앎, 그리고 그 앎을 기술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제임스는 걷는 앎의 양식을 옹호하면서, “아이디어의 추진력을 통해 우리가 대상으로 걸어갈 때, 비로소 우리는 어떤 대상을 알게 된다”고 말한다. 인류학자 팀 잉골드(Tim Ingold)도 유사한 방식으로 앎을 운송(transport)모델과 길을 가는(wayfaring) 모델로 구분한다.8 운송 모델은 앎을 미리 정해진 장소에서 또 다른 특정 장소로 운반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이때 앎은 지식의 형태로, 쌓일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반면 길을 가는 모델은 살아가는 과정 자체를, 즉 길 위에서 다양한 장애물들과 협상하고 대처해 가는 앎의 과정을 바라본다. 이때 앎은 지식의 형태로 쌓이기보다는, 자라고 증식하고 이동한다. 이소요는 “산책하며, 주변을 느끼며” 탐구하고 작업한다고 말한다. 길을 걷는 사람은 우월한 지위나 관망할 수 있는 위치에서 세계를 내려다보지 않는다.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표현을 쓰자면, 길을 걷는 사람은 “겸손한 목격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길을 걷는 사람은 세계가 내뿜는 단서-기호들을 만나고 부딪히면서, 또 미리 규정되지 않은 물질과 생명들의 흐름과 힘을 따라가면서 배운다.9 이러한 삶과 앎의 과정은 다른 생명과 물질의 흐름을 씻어내거나 지워버리지 않은 채 공존하고, 길 위에 또 다른 흔적을 남기고 누적되어 간다.

그렇다면 이제 제목에 쓰인 “아카이브(archive)”라는 표현에 대해 언급하면서 글을 마무리할 준비가 된 것 같다. 아카이브는 흔히 ‘문서고’를 뜻하기 때문에, “걷는”이라는 표현은 얼핏 형용모순으로 보일 수 있다. 이소요는 아카이브에 대한 글쓴이의 질문에 대해 “화가가 물감을 모으는 것만큼 자료들이 작업에서 중요하고 필수적”이라면서, “당장은 사용하지 않더라도 항상 숨 쉬는 것처럼 모으고 보관한다”고 대답한다. 이소요는 억새에 기생하는 야고의 생태를 더 잘 파악하기 위해 최대한 많은 자생지를 걸으며 샘플을 수집하기도 하고, 정약전의 〈자산어보〉를 읽으며 마주친 표현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생물자료를 직접 수집하여 보존물을 만들기도 한다. 작가가 단서-기호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산물들은 작가의 작품을, 더 나아가 작가의 아카이브를 구성한다. 다른 아카이브에서 마주친 자료도 작가에겐 또 다른 단서-기호가 된다. 예를 들면 작가는 20세기 초에 그려진 정찬영의 약초 세밀화 속 식물들을 수집하고 살피면서, “식물이 사람의 시간과 지리의 한계를 넘어 살아오고 있다”는 점을 엿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소요 작가의 아카이브는 마치 도서관의 듀이 십진분류법 시스템처럼 모든 것들을 포괄적인 체계 아래 정렬하고 분류하지 않는다. 고착되고 박제된 자료(data)들을 보존하면서 아카이브를 방문할 이들을 기다리는 문서고를 지어 올리지도 않는다. 그 대신, 이소요의 아카이브는 걷는다. 걷는 아카이브는 이소요가 걸어가는 과정에 대한 단서-기호가 되어, 길을 걷기로 선택한 이들을 만나고 이끌고 안내한다. 그 길에서 우리는 나날이 불확실해져가는 세계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또 다른 앎과 윤리, 그리고 표현과 관계의 방법을 이소요와 함께 배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1. Joseph Amato (2004). On Foot: A History of Walking.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2. 이 글에서 인용은 인터뷰 내용을 편집하여 넣은 것이다. 

  3. Carlo Ginzburg (1979). Clues: Roots of a Scientific Paradigm. Theory & Society, 7 (3), 273-288; Carlo Ginzburg & Anna Davin (1980). Morelli, Freud, and Sherlock Holmes: Clues and Scientific Method. History Workshop, 9, 5-36. 

  4. Gilles Deleuze (2000). Proust and Signs: The Complete Text.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5. Eduardo Kohn (2013). How Forests Think: Toward an Anthropology Beyond the Human.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6. Jakob von Uexküll (2010). A Foray into the Worlds of Animals and Humans.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7. William James (1987). William James: Writings, 1902-1910. New York: Penguin Books. 

  8. Tim Ingold (2010a). Footprints through the Weather-World: Walking, Breathing, Knowing. Journal of the Royal Anthropological Institute, 16, S121-S129. 

  9. Tim Ingold (2010b). Bringing Things to Life: Creative Entanglements in a World of Materials. NCRM Working Paper Series (5/10). ESRC National Centre for Research Metho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