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태훈은 현대 문학과 미디어 테크놀로지에 관한 연구를 한다.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자유전공학부에서 근무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 『우애의 미디올로지』(2012), 『검색되지 않을 자유』(2014), 『시민을 위한 테크놀로지 가이드』(공저, 2017), 『한국 테크노컬처 연대기』(공저, 2017), 『기계비평들』(공저, 2019)가 있다.

신민과는 2017년에 첫 인연을 맺었다. 그전까지 우리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인연은 정중한 메일에서 시작했다. 자신이 어떤 작업을 하는 누구인지, 내가 쓴 어떤 글을 읽었고 무엇이 좋았는지에 대해 쓴 공들인 문장이었다. 글에는 필사적인 노력을 이어가는 사람 특유의 긴장감이 가득했다. 이런 문장을 쓰는 사람이라면 신뢰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 작품에서도 같은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만남 이후, 신민 작가론인 〈‘머리’에 관하여〉(2017)를 쓸 기회를 얻었다.

그로부터 3년이 흘렀다. 신민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필사적으로 자신만의 예술에 매달리고 있었다. 노동과 여성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도 여전히 강렬했다. 하지만 근래 발표된 신민의 작품에는 뚜렷한 변화가 발견된다. 우선 작품의 표정, 포즈가 바뀌었다. 신민과의 인터뷰에서도 이 문제부터 질문했다.

Q. 근래 발표된 작품에서 자세 변화가 눈에 띄었다. 견상 자세 대신에 장승처럼 단단히 우뚝 선 작품이 눈에 띄었다.

A. 예전에는 맥도날드의 노동 환경에 화가 났다. 하지만 지금은 온 사회가 부조리한 노동 환경에 갇혀 있음을 알게 됐다. 나라 시스템 전체 구조의 문제였다. 교묘해졌다. 누구 하나 지목해 열렬히 미워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분노의 대상이 없어졌다. 작은 부분을 건드린다고 해결될 상황이 아니다. 견상 자세로 작품을 만들던, 그때의 깔끔한 분노가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서 있는 사람을 만드는 게 최선이었다. 네 발로 으르렁거리며 엉덩이를 치켜드는 대신에, 똑바로 서서 세상의 복잡함을 복잡함 그대로 응시하고 있다.

Q. 동료 예술가들과 팟캐스트도 하시더라. 그런 교류, 우정의 시간이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기대된다. 예전의 신민은 세상 외로워 보였다.

A. 영향이 크다. 지금 일하는 곳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미술 일을 하면서 만났던 동료들, 작가 뒤에 숨겨진 여러 손의 존재를 말하고 싶었다. 그들의 노동은 대부분 기록되지 않는다. 미술관은 여러 손의 노동, 시간이 합류하는 장소다. 우리가 아는 멋진 미술은 그렇게 세상과 만난다. 하지만 작가와 작품 뒤에 숨겨진 이들의 처우가 대단히 나쁘다. 어디 호소할 데도 없다. 예전처럼 프랜차이즈 업계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곤경을 미술로 풀어내는 건 관심이 없어졌다. 문제의식은 있다. 그러나 이야기를 하려고 할 때마다 거짓말이 되고 만다. 반쯤은 자기 검열이고, 똑 떨어지는 어떤 형상으로 표현해내기엔 마음과 생각이 너무 복잡하다. 미술계도 마찬가지였다. 추악한 면면이 너무 많다. 미술로 인권을 이야기하는 작가조차 형편없는 가해자인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나는 미술계에 환상이 있었다. 미술 대학 출신이 아니라서 더 그랬을 거다. 하지만 이제 완연히 미술계 내부 사람이 되고 말았다. 환상에 도취할 거리 두기가 안 된다. 나는 늘 화를 내고 있다. 이 분노를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이 많다. 동료 예술가들과의 교류는 이 시간을 버티는 데 정말 큰 힘이 되고 있다.

Q. 썩지 않는 쓰레기는 환경 재앙이지만, 불멸의 이물질이라는 괴물 같은 매력이 있다. 난지 레지던시의 과정에서 종이 작업에 대한 태도와 생각에 변화가 있다면?

A.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던 사진이 있지 않나. 콧구멍에 플라스틱 빨대가 꽂혀 고통 받는 거북이를 찍은 사진. 거기서 형성된 여론, 그로부터 급조된 국내의 일회용품 제한 정책. 하지만 쓰레기는 정말 다양한 곳에서 생겨나고 모인다. 하수구 너머의 세계를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소비자의 상상력이 멈춰버리는 지점이다. 내가 일하는 곳도 쓰레기가 너무 많아서 아무 대책도 생각나지 않는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규격 봉투에 쓰레기를 봉해서 쓰레기장으로 떠나보내는 것뿐이다. 쓰레기에 대한 노동을 보이지 않는 다른 사람에게 떠넘긴 것이다.
일 해봐야 안다. 무력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당신의 PC한 행동 따윈 가볍게 압도하는 쓰레기가 범람하는 이곳에서 일해보라. 청결함은 친환경이 될 수 없다. 친환경이 가능하기나 한 건지 의문이다. 해결책인 척하는 해결책뿐이다. 쓰레기를  떠안고 살거나 다른 데 떠넘기고 살거나.

Q. 청결, 용모단정 같은 말도 친환경만큼이나 무신경하고 폭력적이지 않나? 이런 담론과의 대결이 신민의 작품 세계에 논쟁적인 전선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A. 일할 때 머리망을 쓴다. 지저분한 나의 외모를 멸균하는 물건이다. 그걸 뒤집어쓰고 내 외모를 소독한다. 검정 새틴 리본이 달린 머리망은 서비스직 여성의 공통 표식이다. 백화점에서도 커피숍에서도 햄버거집에서도 병원에서도 여성들은 머리망을 한다. 이 머리망을 한 여성을 고객으로 만나면 말하지 않아도 동질감을 느낀다.
나는 머리망을 한 다양한 여성 두상을 만들고 싶다. 머리망으로 대상화된 서비스직 여성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서비스직에서 한 번이라도 일 해봤던 여성들은 머리망을 한 여성 조형물 군상을 보고 굴종의 애환, 벼랑 끝의 생계를 기억할 것이다.

Q. 안타깝게도 예술계도 벗어날 수 없는 쓰레기장의 한복판이다. 추문이 너무 많았다. 이런 시대일수록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A. 10년이 넘게 미술을 하며 만났던 인턴들, 큐레이터들, 코디네이터… 거의 다 여성이다. 그들은 내가 일할 때처럼 유니폼도 머리망도 착용하지 않지만, 전시와 전시가 아닌 것에 관련한 모든 일을 한다. 그들은 전시 포스터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다. 노동의 대가도 제대로 받지 못한다. 노동으로 인정받지도 못했다. 그들은 고용상태가 애매해서 항의도 어렵다. 예술은 취향이니까. 자기가 좋아서 스스로 이 판에 들어왔으니까. 싫으면 나가. 너 말고 일 할 사람 많거든. 소리소문없이 미술계에서 사라진 사람들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슨 일을 하며 살아갈까. 같이 밤새고 설치하고 철수를 돕던 몇몇 사람들에게 종종 안부 메시지를 보내보지만 감감무소식이다. 나 또한 나의 사회비판이 너무 중요했던 나머지 이들이 당하는 착취와 폭력을 대수롭지 않게, 관행처럼 여겼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