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현은 미술이론과 문화연구를 공부하며 글을 쓰고 전시를 기획한다. 미술계에서 활동하지만 미술 안쪽에 있는 미술이 아닌 것들에 더 관심이 많다. 미술과 정치가 서로에게 만들어 내는 틈과 그 가능성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친애하는 이세준 작가에게

안녕하세요. 권태현입니다. 난지 스튜디오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는 날씨가 이렇게 차갑지 않았는데, 벌써 겨울이 코앞이네요. 지금 창밖에는 깃털을 채워 넣은 외투를 입은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총천연색으로 꿈틀거리는 사람들, 바람에 살랑거리는 은행나무, 기하학적으로 솟아오른 건물들, 여기에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하늘에 펼쳐지는 추상적인 공간까지 하나의 화면에 보이네요. 그림에 겹쳐있는 전혀 다른 시점과 형식들, 그리고 인위적인 색채에 대한 질문에, 세계가 원래 그렇게 생기지 않았냐고 답하는 작가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갑자기 안부를 물으려니 괜히 민망하여 서두가 길어졌네요. 그간 잘 지내고 계셨나요?

저번 만남 이후로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곱씹고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고 갔죠.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관념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가장 작은 붓질부터 저 멀리 우주에 대한 이해까지. 이상하게 극단을 오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특히 신흥 종교 라엘리안 무브먼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사실 신흥 종교 리서치는 저에게 은밀한 취미 같은 것이었는데, 다른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본 경험은 거의 없었거든요.) 스튜디오에서 이야기를 나누니 대화와 작업들이 겹쳐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은 종종 경험해 보았지만, 누군가 하는 말들과 그가 만들어낸 것이 이토록 잘 통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생각했어요. 말과 그림의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들이 한데 모여 있는 형상의 문제랄까요. 그래서 글도 그런 모습을 따라가 보려고 합니다. 이 텍스트는 이렇게 편지로 시작하지만, 끝까지 편지로 읽힐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일련의 이야기는 아마 세계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작가님의 이전 개인전 제목이었죠. 여러 사람들에게 세계관에 대한 설문을 받고, 그 답변을 바탕으로 작업을 하셨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저는 세계관(world view, Weltanschauung)의 ‘관’, 영어의 ‘view’, 독일어의 ‘Anschauung’이 모두 응시, 관찰, 직관 등 본다는 의미를 지녔다는 것을 생각했어요. 우리는 같은 세계에 공존하고 있는 것 같지만, 세계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에 따라서 각기 다른 세계를 살고 있을 수도 있겠죠. 세계를 보는 문제가 세계를 구성할 수 있다는 점은, 이러한 주제가 그림으로 다루어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작가님의 그림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봐야 하는 형식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습니다. 풍경으로부터 추상으로 가거나, 해부학적 일러스트를 바탕으로 전혀 다른 형상이 겹쳐지는 것처럼 말이죠. 그것들은 존재의 다름이 아니라, 보는 방법의 다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창밖을 보는 눈과 지도를 보는 눈만큼의 차이랄까요.

사학자 마틴 제이는 「모더니티의 시각 체제들」이라는 글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원근법과 바로크의 시각성, 그리고 17세기 네덜란드의 시각성에서 보이는 분열을 통해, 우리가 단일하고 지배적이라고 여겨왔던 서양의 원근법 체제가 애초에 지니고 있던 분열을 짚어낸다. 모더니티의 시각성은 여러 가지 이론과 실천이 조화롭게 통합되어 지배적인 하나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고 그 안에서도 수많은 시각 체제들 사이의 경쟁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의 원근법, 다시 말해 알베르티적 원근법주의는 자연스럽고 과학적이며 기하학적으로 세계의 모습을 포착한다고 알려져 왔다. 그것은 근대적 사유, 그러니까 데카르트적 주체와 연결되는 헤게모니적 시각성이기도 하다. 그러한 원근법은 화면 안에 총체적으로 구성되는 서사를 가지며, 프레임 뒤쪽으로 확장성을 가지고 세계를 담아내는 창문의 모델이다. 그에 비하여 베르메르를 비롯한 네덜란드의 회화는 화면이 총체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제각각 독립적인 의미를 가지고 작동하는 지도에 비견할 수 있다. 지도는 그 뒤로 더 뻗어 나갈 수 없는 평평한 표면이고 이미지뿐만 아니라 텍스트 등을 포함하며, 전체 구성에서 작동하기보다는 제각각 읽힌다. 각각의 그림은 창밖을 보는 것과 지도를 보는 것만큼의 전혀 다른 보는 방법과 연결된다. 훑어보는 것과 응시하는 것, 이성적인 보기와 욕망하는 보기 등 어떤 것이 헤게모니를 잡는 순간은 있지만, 하나의 원근법 체제 안에서도 보는 법들은 항상 투쟁하고 있다. 나아가, 하나의 원근법 체제가 아니라 동아시아의 시각적 체제와 같이 아예 다른 방식의 시각성이 함께 작동한다면?

제가 스튜디오에서 발견한 미완성의 그림을 보고, 섞여서는 안 되는 것들이 섞여서 이상한 화학반응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더니, 작가님이 “마녀의 수프”라고 하셨던 것이 떠오릅니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 같다고. 현실에서는 아무리 다른 물질들을 섞어 놓아도 잠깐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고, 곧 시간이 지나면 엔트로피는 평형 상태를 이루게 되지요. 어떤 경우에는 다른 것들이 화학적으로 섞여 하나의 물질이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작가님의 그림에서는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쉼 없이 끓어오르는 힘이 계속해서 느껴집니다. 멈춰 있기에 오히려 더 움직인다고 해야 할까요. 가장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나는 이질적인 것들의 만남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는 듯합니다. 회화라는 매체가 지닌 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기도 하네요. 이참에 저도 그런 수프를 한번 끓여보는 중입니다. 물론 이미지가 할 수 있는 것처럼 폭발적인 힘이 느껴지지는 않을 수 있으나, 텍스트는 그 나름의 오묘한 맛이 있으니까요. 또 마녀의 수프는 몸을 있는 그대로 건강하게 만들기보다는, 마법적으로 변용되는 순간을 만들어내잖아요. 특히 몸의 크기와 같이 스케일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많다는 것은 생각해볼 만합니다.

질 들뢰즈는 스피노자에 대한 강연에서 그 철학자의 개념어에 대한 프랑스어 번역 문제를 먼저 꼬집는다. 스피노자의 아펙티오(affectio)와 아펙투스(affectus)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아펙시옹(affecion)으로 번역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아펙티오는 아펙시옹으로, 아펙투스는 아펙트(affect)로 옮겨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어에서 아펙티오는 보통 ‘변용’이라고 번역하고, 아펙투스는 ‘정동’을 주로 쓰지만, ‘정서’, ‘감응’, ‘감정’ 등의 번역어가 혼재되어 있다.

“나는 감정을 신체의 변용으로 이해하는데, 이 변용을 통해서 신체의 행위 능력은 증가하거나 감소하고, 도움을 받거나 방해받는다.” “우리가 정념이라고 부르는 감정은 혼동된 관념으로서, 그것을 통해 정신은 자신의 신체가 이전에 비해서 갖는 더 크거나 더 적은 존재의 힘을 긍정한다.” “내가 이전보다 더 큰 혹은 더 적은 존재의 힘을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은, 정신이 신체의 현재 상태와 과거 상태를 비교한다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형식을 구성하는 관념이 신체에 대해 실제로 이전보다 더 큰 혹은 더 적은 실재성을 포함하고 있는 어떤 것을 긍정한다는 것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스피노자, 『에티카』, 질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 민음사, 2001, pp.76-81.에서 재인용.)

여러 개의 캔버스로 이루어진 작업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그중 하나를 빼내어 보아도 그대로 작동하는 독립적인 작업이 될 수 있냐고 물었는데, 당연하다고 말씀하셨죠. 부분과 전체의 문제는 항상 흥미로운 주제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화면 안과 바깥에서 동시에 작동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여기서 부분은 또 다른 스케일에서 보았을 때, 또 다른 부분들의 전체이고, 그 전체는 다시 부분이 되는. 그런 감각은 어떤 이미지도, 어떤 물질도 다른 조형의 수단으로 환원되지 않도록 합니다. 지금 보고 있는 스케일에서 나름의 자율성을 가지고 작동하는 형상이 되지요.

“130년 전 멸종한 줄 알았던 전설 속 ‘요정새’가 코로나로 사람들 뜸해지자 다시 돌아왔다” (『더 에포크 타임즈』, 2020년 8월 18일.)

화면에 나타나는 추상적인 부분에 대한 이야기도 한참을 나누었습니다. 대화는 구글 어스나 구글 마스에 대한 것으로 번져나갔고, 가상적 이동뿐만 아니라 극단적인 확대와 축소가 가능한 인터페이스와 그것에서 가능해지는 추상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죠. 관념적인 추상이 아니라, 구상의 극단에서 포착되는 추상적인 면이랄까요.

폴 비릴리오는 속도가 세계의 형태를 어떻게 바꾸는지를 이야기한다. 속도가 사물의 출현 가능성이나 형식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속도 중에서도 경쟁적으로 계속 빨라지는 질주의 문제를 다루며 그는 자신의 논의에 ‘질주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특히 그러한 가속화가 회화와 영상, 조각 등에서 추상화를 초래했다는 주장은 흥미롭다. 이제 속도는 신체적인 것과 광학적인 것을 넘어 인터넷을 타고 움직인다. 가상의 현전은 더욱더 부추겨지고, 공간을 바탕으로 체화된 경험은 점점 더 축소되고 있다. 비릴리오는 테크놀로지의 가속화가 우리의 지각작용이 가 닿을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서 ‘소멸’로 질주해버렸다고 말한다. 세계가 실제의 크기에서 벗어나 극단적인 초소형화와 초대형화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님의 그림들은 여전히 부글부글 잘 끓고 있나요? 이 글에도 더 이상한 것들을 몇 스푼 더 넣고 싶지만, 곧 냄비가 넘쳐버릴 것 같습니다. 이상한 수프를 끓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네요. 작가님과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한 스푼씩 넣을 때마다 올라오는 냄새가 오묘하게 바뀌는 것이 참 신기했습니다. 취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에서 이미 마법이 일어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또 만나 뵙고 싶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각자 더 많은 세계를 통과하여 다시 만날 수 있길 바라며.

권태현 드림